티어크라이스 / 사막의 기억 |
설정집이 나오기 전에 썼더니 대부분 날조설정이에요.
설정집과 가이드를 본 후 캐릭터에 대한 생각도 바뀐 부분이 많아서 가려둡니다.
미즈락이 그런 사정에 대해 전혀 생각해 봤을 리 없다.
"봐요, 쟈남이나 라이텔실트엔 서가 있는데 사르사빌에는 서가 없잖아요. 사르사빌은 쟈남과 가깝고, 사르사빌 사람들과 쟈남 사람들은 생김새도 비슷하니까 같은 세상 출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원래부터 이 세상에 있었다는 시트로 사람들도 사르사빌이나 쟈남 사람들과는 닮았다고요. 가능성은 낮지만 어쩌면 라이텔실트와 함께 융합되었을 수도 있고요. 사르사빌이 어느 세상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아무나 붙들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미즈락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서야 자신이 노곤하고도 따분한 발굴 작업 한가운데 삽을 든 채로 꼬빡 졸아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냐는 바즈로프 장군 옆에서 얼쩡거리며 틈을 보고 있었다. 노프레트의 시커먼 부하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는 노프레트와 아스아드와 여기저기 손짓을 해가며 심각해 보이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래바람 탓인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두 사람의 모습은 누렇게 바래어 보였다. 미즈락은 눈을 비볐다. 바람소리 사이로 아냐가 조잘거리는 소리가 이따금 섞여들었다.
"이건 중요한 사항이에요."
눈을 반짝이면서 아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르사빌이 쟈남과 함께 이 세상에 융합된 거라면 모르겠지만, 사르사빌이 먼저 이 땅에 있었고 쟈남이 나중에 나타난 거라면 그 이전에 사르사빌은 지금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사르사빌 위에 쟈남이 내려앉은 형태가 되겠죠. 아니면 라이텔실트와 사르사빌 사이에 바다가 없었을 수도 있어요. 원래는 사르사빌이었던 땅 위에 라이텔실트가 바다와 함께 내려앉았을 수도 있다고요. 융합 때문에 원래는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강대한 국가였던 사르사빌이 바다에 면한 무역도시가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요. 어때요?"
아냐는 미즈락의 의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가 보다. 미즈락이 어물어물하는 사이 혼자서 손을 마주치고는 팔랑팔랑 뛰어가 버렸으니 말이다. "아, 디아도라씨한테 물어보면 알겠구나." 아냐는 몰랐겠지만 아냐의 가정은 누구보다 사르사빌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사나이 미즈락이 분통을 터뜨리도록 했다. 사막에 도착하기까지 내내 발끝에 걸리는 돌부리를 걷어차면서 멋대로 이 세상에 융합해 들어온 쟈남과 라이텔실트, 융합을 방치하고 조종하는 협회, 이 빌어먹을 백만 세계를 만든 신에 해당하는 누군가를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암만 삿대질하면서 욕을 해봐도 미즈락에게 그들의 형체는 손에 쥐어도 바스러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더미와 다르지 않았다."그거 큰일 날 뻔 했네요."
다시 아냐가 끼어들었다.
"포트아크에서 우리랑 싸우기 전까지는 부부가 처음 만난 장소를 잊어버렸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거네요."
"호적수와의 첫 대전을 잊어버렸을 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와의 첫 인연조차 잊어버린 팔푼이가 될 뻔했지."
"여자들에겐 그런 거 굉장히 중요하다고요."
목적을 달성했는지 아냐는 한결 느긋하게 추임새를 넣었다. 장군이 껄껄 웃었다.
"그렇지. 일족이 협회에 속아 넘어가 협회의 뜻에 따라 싸우고 있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하나의 과거가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으로만 이어지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때 그 과거가 있기에 지금이 있으니까."
미즈락은 제국에 대해서 딱히 좋은 기억이 없다.
미즈락이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사르사빌은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미즈락이 나고 자란 동네의 사람들은 합병을 반대하는 쪽에 속했다. 북쪽에서 온 망할 것들과 헛돌아가는 나라를 욕하는 것은 인사할 때나 밥 먹을 때 하는 일상적인 인사와 같았다. 오랜 세월 쟈남에 대항하며 긍지를 지켜 온 사르사빌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잊지 못했다. 그러나 그 때도 사르사빌은 독립된 나라라기보다는 속국에 가까웠던 데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옛날이야기 속의 긍지 높은 사르사빌 사람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조작된 기억일지는 모를 일이다.
세월은 멈춰있지 않는다. 미즈락이 딱 동네 또래 놈들과 투덕거리고 돌아다닐 즘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탓하는 데도 지쳐갔고, 쟈남은 사르사빌의 군사적 안전과 도로 시설의 확충과 무역항으로서의 부를 약속했다. 사르사빌의 공주가 볼모와 마찬가지의 형태로 쟈남으로 넘어간 것도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실제로 사르사빌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바뀌어갔다. 쟈남의 물자가 사르사빌로 몰리면서 기죽어 있던 마을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장 완고하던 사람들도 점차 고개를 숙였다. 미즈락은 이 변화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의 생활은 풍족해질지언정, 정작 발전하는 것은 쟈남일 뿐 사르사빌은 사라져버렸으니.
미즈락은 해방군에 들어갔다. 쟈남에 대한 무력 대항도 그 무렵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터라 딱히 활동이라 부를 만 한 행동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미즈락은 개의치 않았다. 하루는 제국 수비대의 요새에 숨어드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미즈락은 라이텔실트에서 들여온 주먹만 한 폭탄 두 개를 품고 있었다. 그 시절에만 해도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희생만으로 사르사빌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꿈꾸고 있었으니 확실히 어리긴 했다. 폭탄 하나를 병영 뒤에, 남은 하나를 무기고 뒤에 놓고서 미즈락은 요새에서 계곡으로 이어지는 후미진 길목까지 뛰었다. 사르사빌 동부에서 왔다는 꼬마가 옆에서 같이 뛰었다. 나머지 동료들은 신호가 오르면 계곡을 따라 요새로 진입할 예정이었다.
등 뒤에서 울리는 폭발 소리를 들으면서 미즈락은 탄성을 질렀다. 돌아보면 요새의 중앙부로부터 시커먼 하늘을 향해 맹렬하게 불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매연을 옷깃 삼아 너풀거리며 춤이라도 추는 듯 아름다웠기에 그 순간만큼은 수비대에게 들킨대도, 군화발로 짓밟힌대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다. 미즈락은 꼬마가 소매를 잡아당길 때까지 실컷 웃어젖혔다. 꼬마가 제자리에서 발을 툭툭 굴러보더니 땅에 귀를 갖다 대었다.
"이상해. 땅이 울리는 것 같지 않아?"
따라서 바닥에 귀를 대어보았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숫자를 셋 셀 수 있을 정도의 시간에 불과하더라도 그만큼 더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거라.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잔모래 너머로 미즈락은 벌겋게 회오리치는 빛무리를 보았다. 순식간에 눈앞의 땅바닥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미즈락은 팔로 머리를 감싸고 넙죽 엎드렸다. 흙더미와 자갈, 어른 주먹 크기는 될 법한 돌덩이가 뒤통수와 채 가리지 못한 등과 허리 위로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귀를 찢을듯 한 굉음과 온몸 위로 쏟아지는 얼얼한 진동 속에서도 등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생생하게 났다. 미즈락은 머리를 더 단단하게 싸쥐었다.
가까스로 눈을 돌리면 꼬마가 똑같은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헤벌어진 입으로 꼬마가 웅얼거렸다.
"마도병단 놈들이야."
그 해 미즈락은 두 계절이 다 지나도록 제국 놈들을 곰씹으면서 침침한 방구석에서 끙끙 앓아야 했다.
아직도 미즈락은 제국 출신 동료들을 가까이 대하기 껄끄러웠다. 마도병단 소속이었던 동료일 경우 더 그랬다. 미즈락은 단장이 발굴 작업을 돕기 위한 인원을 추려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장 뒤에서 서류 뭉치를 들고 선 채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던 참모 역의 아이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시안, 정말로 별 일 없을까나."
"해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할 수 있는 만큼은 열심히 해 봐야지."
무슨 뜻으로 대답하는지 모르겠다고 참모는 눈을 감싸 짚었다. 단장은 자신보다 반 뼘은 더 큰 미즈락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단장은 대개는 멋모르는 꼬마의 모습이었지만 때로는 알 거 다 아는 노련한 노인네로도 보였다. 단장을 따라 히죽히죽 웃으면서 뒷머리를 벅벅 긁던 미즈락의 시야 한 구석에 걱정스레 뒤를 돌아보는 참모의 모습이 잡혔다. 그 뒤에 노프레트와 멋쩍어 보이는 아스아드가 있었다. 미즈락은 히죽거리던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아스아드만큼 훤칠한 노프레트는 나란히 선 아스아드에게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넌 제국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괜찮겠어?"
"제가 자원했습니다. 제국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아니까요."
노프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프레트는 지도를 들고 있었다. 아스아드는 지도 위의 어느 부분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번엔 이 근처로 갈 예정이지요?"
미즈락은 아스아드와 이야기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주로 성에서 샴스와 마나릴을 지키는 위치에 있는 미즈락에 비해 아스아드는 제국의 잔병을 이끌고 파견을 나가거나 전선에 설 일이 많아서 둘은 마주칠 기회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미즈락에게 아스아드는 샌님과 같은 인상이었다. 싸움에 나설 때는 소리도 지르고 날뛰기도 한다고는 들었지만 그런 모습을 성에서 볼 일은 없었다. 평소의 아스아드는 조용히 자리를 지킬 뿐이고, 편하게 말을 걸어보려 해도 꼭꼭 경어로 대답을 했다. 도통 재미가 없다. 그리고 그보다도 제국군이라는 출신성분은 방패처럼 미즈락의 접근을 튕겨냈다. 미즈락은 얼른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아스아드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아스아드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미즈락도 얼떨결에 따라서 인사하고 말았다.
손에서 삽이 미끄러지는 통에 미즈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올리니 바로 아스아드가 보였다. 아스아드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 자식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고 있는 건가.
"쟈남 남서부를 방어하는 요새였습니다. 미스라트 강의 남쪽 지류와 사르사빌 북쪽을 휘감는 산맥이 만나면서 자연스레 요새가 형성되어 분쟁도 많았던 지역입니다. 다른 지역처럼 이곳도 지형이 사막으로 바뀌는 과정이 다른 소멸과정보다 먼저 진행되었는지 요새의 시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더군요."
"누굴 바보로 알아?"
미즈락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스아드가 가만히 미즈락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모습이 미즈락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가 여기서 죽었어. 넌 잊어버렸을지 몰라도 난 잊지 못해!"
"전 이 요새에서 싸웠던 적이 없습니다."
아스아드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게 대답했다. 미즈락은 부아가 치밀었다. 화날 만도 했다. 오래 전 이곳에서 머리가 무참히 깨진 채로 마지막 숨을 내쉰 꼬마를 위해 미즈락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마도병단과 한 때나마 동료였다고 부르기도 구역질나는 배신자들과 정복욕에 눈이 먼 쟈남의 황제에게 복수해야만 했다. 미즈락은 그만 잊어버리고 싶은 하루의 공포와 분노와 역겨움을 기어코 끄집어내 곰씹으면서 지난 십여 년을 보내왔다. 십여 년이라고 말이 쉽지, 미즈락에게는 반생에 가까운 세월이다. 그 세월의 기억을 송두리째 잊어버리다니 정신이 어떻게 됐었다. 겨우 기억을 되찾았더니 이번엔 복수할 대상들이 고스란히 사라져버렸다.
제국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서 제국이 해 온 일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라고는 손가락으로도 셀 수 있을 만한 수가 겨우 남았다. 세상은 커다란 비극 앞에서 작은 비극 따위는 얼마든지 덮어 지워버린다. 사실 완전히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지는 않다. 본의 아니게 망각을 얻었던 동안 미즈락은 악의라고는 없는, 누구 앞에서도 당당한 사르사빌 사람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평안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니라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왜곡에 의한 부산물일 뿐이다. 완벽하게,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다면 먼 훗날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젊었던 시절을 돌이켜볼 때 이상하리만큼 한 조각의 감정도 남기지 않고 텅 비어버린 공간을 과연 눈치 챌 수 있을까? 미즈락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더러운 얼룩이 모래바닥에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아스아드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미즈락은 목구멍을 넘어 오르려는 뜨거운 덩어리를 꼴깍 삼켰다.
"미안……."
"죄송합니다."
미즈락의 사과는 아스아드의 한 호흡 빠른 사과에 가로막혔다. 미즈락은 허둥댔다.
"형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제국을 대신해 사죄드립니다. 국가 간의 분쟁 중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그로 인해 소중한 분을 잃은 것은 사실이겠지요. 제국이라는 출신 외에 제가 죄송해야 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국에는 더 이상 사죄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라도 대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과를 그대로 받아도 좋을지 미즈락은 알 수 없었다. 허겁지겁 할 말을 찾으면서 미즈락은 아스아드의 눈치를 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든 아스아드는 더 이상 미즈락을 향하지 않았다. 흐릿하게 잠겨드는 사막 저편을 쏘아내듯 바라보는 아스아드의 얼굴이 미즈락의 눈에는 굉장히 목말라 보였다.
"아니,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에요."
아스아드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땅도 하늘도 모래로 가득한 사막 속에서 아스아드는 물고기 한 마리가 되었다. 모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아스아드는 발버둥 친다. 소용없었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모래 속으로 빠져들 뿐이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만 있다면 모래 가득한 공기라도 마실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까끌까끌한 바람이 폐에 닿지 않도록 깨끗하게 걸러줄 수 있는 기관이 아스아드에게는 달려있지 않았다. 아가미에 모래가 섞여들어 아스아드는 켁켁거렸다. 매워서 눈물이 다 났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있으면 숨을 쉴 수 있다. 모래는 물을 머금지 못한다. 모래 위에 한 방울 똑 떨어진 눈물은 주위에 잠시 푸석푸석한 흔적을 만들며 동그랗게 섰다가 이내 입자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스아드는 바닥을 파헤쳤다. 모래더미는 허공과 같았다. 파헤치고 또 파헤쳐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방울은 손에 닿을 듯 말 듯 멀어져간다. 소금 섞인 짠 물이라도 손에 넣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다. 물방울을 향해 아스아드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모래 더미에서 아스아드가 길쭉한 덩어리를 파내는 모습을 옆에서 아냐가 빠끔히 넘겨보았다.
"그건 뭐예요?"
"창입니다. 사르사빌에서도 비슷한 양식의 창을 사용하지만 자루와 창날을 연결하는 부위의 이 문양은 쟈남에서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가공한 것입니다. 이 근처는 무기고가 있던 곳이라서 무기를 많이 발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모래에 상했겠지만 남겨놓으면 사료로 복원할 수 있겠지요. 일부는 실제로 사용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아냐에게는 별 흥미 없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아스아드가 창에서 모래를 털어내는 동안 아, 그렇구나, 그래요 등등 성의 없는 대꾸를 줄줄 늘어놓다 말고 아냐는 문득 손을 뻗었다. 손바닥 한 점에 가볍지만 싸늘한 충격이 닿았다. 아냐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마, 비가 와요."
아스아드도 고개를 들었다.
"그거 아세요? 소타 할아버지한테 들었는데요. 쟈남 지역은 물이 부족한 기후가 아니래요. 바람이 많이 불고, 바다에 접해 있어서 비구름도 많이 일어난대요. 융합으로 땅은 바뀌었지만 기후까지 바뀌지는 않았다는 뜻이에요. 다른 세상에서 온 이 사막은 모래가 깊이 쌓여 있어서 지금 당장은 비가 고이지 않지만 오랜 세월 비가 내리면 이 모래땅도 옥토가 될 수도 있다고 했어요."
"멋진 일이네요."
"앞으로 수백 년 지나면 이 땅도 사람이 살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숲이 생기고 마을이랑 도시가 생기겠지요. 나라도요."
그러나 그 나라가 쟈남이 되지는 않는다. 입 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려 노력하면서 아스아드는 창을 꼭 쥐었다. 한동안 모래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창은 발굴 작업으로 말라붙은 손에 착 감겨들었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아무리 아득한 숫자라 해도 아스아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빗물이 일구어 낼 새 땅이 쟈남이라는 나라가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온전히 덮어버리게 할 수는 없었다. 모래바람에 풍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기억의 파편을 향해 아스아드는 다시 손을 뻗었다.
# by | 2009/03/10 02:31 | 잡문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