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어크라이스 연습1

제일이 방에 들어섰을 때 침대 위에 이불이 걷어차기 좋도록 동그랗게 말려있었다.

"으와, 너, 제일이지!"

예상했던 대로 이불더미가 끙끙거렸다. 소리가 커질 때까지 제일은 이불을 툭툭 찼다.

"그, 그만, 그만요, 잘못했습니다, 농땡이 피워서 죄송합니다. 아야야, 이만 일어날게요. 일어난다니까. 그만!"

결국 리우는 침대 모서리까지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이불을 둘둘 만 채로 기어갔다는 것이 근성이라면 근성이겠다. 제일이 눈짓하자 이불더미 속에서 꿈지럭꿈지럭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이 방에 책이 있기에 보고 있었던 것뿐이라고요. 

커튼을 열어젖히고서 제일은 침대 반대쪽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이미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창문 앞에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서늘한 공기와 함께 한 무더기의 햇빛이 비스듬하게 들이비쳤다. 뻗어드는 빛의 궤적 속에서 먼지가 뿌옇게 너울거렸다. 이 성에 머무르게 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성의 넓이에 비해 성에 머무르게 된 사람들의 수는 극히 부족하다. 하물며 방주인은 성에 짐 풀자 마자 바로 자리를 비웠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성은 손봐야 할 곳이 많았고 방주인의 친구들이라고 다른 방 청소까지 챙겨서 해 줄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았던 터라 방 안이 먼지구덩이인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고 제일이 딱히 청소를 하기 위해 시안의 방에 찾아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먼지를 하나하나 세기라도 하는 양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제일을 멍하니 보다가 리우는 책을 슬슬 끌어당겼다. 손대중으로 적당히 페이지를 넘겨 누렇게 바래어 아물거리는 글씨를 적당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눈은 햇볕에 따갑고 이불 속은 따뜻하고 머리 위는 서늘하니 또 졸리다. 928년 초 황제는 의회를 소집하고, 소집하고, 또 소집하고. 같은 문장 위에서 맴을 돌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더니 제일은 조금 전 그대로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뭐 해?"
"기다린다."
"뭘?"

보아하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던가 보다. 

"저기, 시안이랑 마리카가 출발한 지 아직 열흘밖에 안 지났거든? 엘 카란에서 황제만 만나고 돌아온다고 해도 보름은 훨씬 더 걸릴 거야. 알현이 무사히 끝난다고 해도 시안이 처음 가보는 제국인데 바로 돌아오지는 않을걸. 지금쯤 여기저기 구경 다닌다고 정신없겠다. 그래도 마리카도 붙어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않아. 조바심내고 있는 건 너겠지."
"그럴까나."

제일이 힐끔 쳐다보았다. 리우는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정말 걱정 안 돼?"

별 말 없이 제일은 주머니칼을 꺼내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끝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폼이 대답할 마음도 없이 보이기에 리우도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서너 페이지 정도가 느긋한 속도로 배를 뒤집고 나서야 제일은 손을 털고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난 시안을 믿어."

흘려버리는 듯한 대답이었지만 다행히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놓쳤어도 상관없을 뻔 했다. 제일이 저럴 때 정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문제다. 시트로 마을에 발붙인 지 못해도 3년은 지났다. 시안을 대하는 건 만나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도 별 거리낌이 없었는데, 제일에게는 가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어려울 때가 있었다. 

리우라고 시안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 막나가고 장난기가 심하긴 해도 상당히 똘똘하고 제 앞가림도 잘 하는 친구다. 다급한 일이 생겨도 워낙 행동력 좋은 놈이니까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헤쳐 나올 수는 있을 거라는 믿음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제일이 믿는다고 말하는 건 그런 정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제일이 시안을 믿는 것에는 어째서라던가 왜라던가 하는 이유는 따라붙지 않는다. 어렸을 땐 서로 굉장히 사이가 나쁜 악동들이었다는데 리우가 시트로 마을에 처음 왔을 때부터도 제일은 저런 상태였으니 리우로서는 사연을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까 떨떠름하게, 좋겠네, 하고 웃고 말았다. 서슴없이 믿을 상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 맞기는 하다. 책을 덮고 리우도 다시 이불 속으로 굴러들었다. 제일은 괘씸하게도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나뭇가지가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린과 로건이 성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소리가 마음 불편하게 섞여 들어왔다. 일어나서 바닥이라도 한 번 더 닦고 부서진 창문이라도 고쳐 다는 게 건설적이라는 건 알고는 있지만…….

대신 리우는 제일의 등판을 쿡쿡 찔러보았다.

"믿는 건 믿는 거고 한 번 들어봐."

대답이 없는 것은 긍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협회군은 그레이릿지까지 철수한 상태잖아. 그렇게 먼 먼 거리라고는 할 수 없지. 아직 기사단이랑 마도병단 사람들이 일부 성에 남아있긴 하지만 대단한 병력은 아니야. 크로데킬드씨랑 아스아드씨가 지금 성을 비우고 있는 거야 이미 저네들 귀에 들어갔을 걸. 그럼 왜 아직까지도 가만히 있는 걸까. 협회는 아직 이 땅을 무리해서까지 차지할 생각이 없는 거지. 그레이릿지는 원래 협회의 영향이 큰 동네이긴 했지만 거기를 완전히 장악한 것도 바로 요 전의 일이잖아. 협회 입장에서는 그레이릿지만 해도 손봐야 할 것들이 많을 거야. 전선은 제국 령을 따라 펼쳐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길고, 요전에 여기까지 손을 댄 것도 협회로써는 살짝 무리한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긴 해."

"제국으로서도 우리와 동맹을 맺는 게 아쉬울 건 없어. 제국에게 여기는 지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넘겨주기도 아까운 땅이야. 먼저 동맹 이야기를 꺼낸 것도 제국이잖아. 시안이 제국에서 엄청난 난동이라도 부리지 않는 한 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긴 한데." 

돌아누운 등이 조금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리우는 낑낑거리고 몸을 일으켜 제일을 넘겨보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뭔가 빠뜨린 기분이 드는 걸까?"

제일은 별 반응이 없었다. 딱히 대답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리우는 다시 돌아누웠다. 머리맡에 어젯밤부터 좀처럼 페이지가 넘어갈 생각을 않던 책이 펼쳐져 있다. 책은 시안이 이 방을 자기 방으로 찜하기 전부터 방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시안은 채 방 정리를 할 틈도 없이 출발했으니 책은 유적과 함께 나타나 옛날 옛적부터 그 자리에 있어왔던 척을 하고 있는 셈이다. 보관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종이가 누렇게 바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래 된 책은 아니었다. 제국사 이해. 어제 무심코 시안의 방에 들어온 리우의 눈을 끌어 잡은 제목이다. 금박으로 또렷하게 찍힌 글씨 밑에 제국연합의 흥망이라는 부제가 조그맣게 붙어있었다. 리우가 알기로는 제국의 역사에 제국이 연합이었던 적은 없었다. 

이불이 홱 당겨지는 통에 리우는 퍼들쩍 놀랐다.

"일어나. 나간다."

어느새 제일이 일어서서 이불을 걷어치우고 있었다. 

"지금? 어딜?"
"그레이릿지에 가서 지부 상황이라도 보고 오자. 게이트를 열면 금방 다녀올 수 있으니까."
"아, 그, 그래." 

대답하고도 한참을 멍청스럽게 올려보는 리우를 빤히 보다가 제일은 손을 내밀었다. 리우도 얼떨결에 제일을 붙들고 따라 일어서서 머릿속 잡생각을 걷어내는 것처럼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털어냈다. 제일은 정말 모르겠다니까. 그래도 제일은 이러저러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는 있었다. 시안은 말이 많다. 생각나는 대로 솔직하게 말한다. 제일은 어지간해선 좀처럼 말을 하지 않으려 든다. 시안은 행동이 크고 표현이 격하지만 제일은 시안에 비해 행동이 절제되어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둘은 닮았다. 고집 센 구석이랄지 마음먹는 즉시 움직이는 행동력이랄지 확실히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둘은 분명 닮았다.  

지금도 시안이 있었다면 '나서보지 않고서 어떻게 알아'라고 언제나 입에 담는 한 마디를 또다시 뱉으면서 손을 잡아끌었을 것이다. 제일은 시안이 하는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시안이 할 말이니까 나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는 이유다. 제일은 그저 말없이 손을 잡아끈다. 그리고 대개는 친구들이 옳았다. 침대머리에서 고민만 하고 있어봤자 소용없다. 새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다 하더라도 햇빛을 직접 맞으면서 몸을 움직이고 나면 기분전환이라도 될 터였다. 방을 나서기 전에 리우는 마지막으로 침대 위에 덩그러니 팽개쳐진 책을 돌아보았다. 넘어갈락 말락 하는 페이지가 신경 쓰였지만 눈 꼭 감기로 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은 잊어버리자.

by 모에라 | 2009/01/14 23:26 | 잡문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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