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3.22 / TK

며칠째 머리 꼭대기만 보고 있는 제일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마리카는 모자를 벗어들고 제일의 머리에 씌워눌렀다. 앞머리가 거슬릴 줄 알았는데 이마랑 같이 모자 속으로 쏙 들어갔다. 머리 뒤쪽으로 미끄러뜨렸더니 더 그럴싸해졌다. "야, 마리카한테는 작았는데 너가 쓰니까 꼭 맞잖아! 마리카 너 보기보다 머리 크다?" 옆에서 뒤집어져라 웃는 시안은 걷어차서 조용히 시킨 다음 마리카는 제일을 향해 을렀다.

"너도 다음부턴 갖고 싶으면 갖고 싶다고 말하란 말이야!"

제일은 여전히 마리카를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리카는 속이 터졌다. 

"너 주는 거야. 좋으면 좋다고 말하라니까!"

그제야 제일은 머리 위로 손을 슬금슬금 올렸다. 소리내어 웃지는 않아도 입끝이 금방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을 마리카는 놓치지 않았다. 좋지? 좋지? 몇 번 거듭 물어본 뒤에야 제일은 옆에 바짝 붙은 마리카에게 겨우 들릴 듯 말 듯 '좋아'라고 웅얼거렸다. 등짝 한 번 찰싹 때려주고 다시 멀찍이 떨어져 마리카는 제일을 훑어보았다. 언니가 한참을 고심해서 만들어 준 모자다. 아빠가 그레이릿지까지 가서 끊어온 천을 동그랗게 오리고 꿰메어 모자를 완성한 날, 언니는 마리카에게 모자를 씌우고서 새침한 공주님 같다고 좋아했었다. 그 모자가 제일에게 맞추어 만든 것처럼 꼭 맞았다. 마을 아이들을 고르게 챙기는 언니는 마리카가 제일에게 모자를 주었다고 해도 섭섭하게 여기지는 않을 거라. 마리카는 살짝 분했다. 

by 모에라 | 2009/03/22 15:31 | 낙서 | 덧글(0)

 

티어크라이스 / 사막의 기억

설정집이 나오기 전에 썼더니 대부분 날조설정이에요.
설정집과 가이드를 본 후 캐릭터에 대한 생각도 바뀐 부분이 많아서 가려둡니다.



계속 >>

by 모에라 | 2009/03/10 02:31 | 잡문 | 덧글(0)

 

09.02.09 / TK

지도를 보아야 할 일이 종종 있다. 때로는 오래 된 지도를 본다. 스크라이브들이 오랜 세월동안 모아온 지도들을 나란히 늘어놓는다. 나이네니스가 없는 지도. 루기에닉스가 없는 지도. 아스트라시아가 없는 지도. 백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 차례 얼굴을 바꾼 지도들은 전세계에 단 수십여 명 남은 사람들이 추억을 돌이키기 위한 용도를 제외하고서는 쓸모를 잃어버렸다. 역사적 사료 정도의 가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고 스크라이브들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 더 이상 지켜야 할 과거를 기억해낼 수 없게 되었을 때, 미래의 사람들은 사막에서 발굴한 유물과 그 시절의 지도를 보며 고대에 홀연히 사라진 어느 한 나라를 상상할 것이다. 지금은 손닿을 수도 없는 먼 훗날의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고르는 지도는 치오루이산과 제국이 남아있는 지도이다. 몇년 전 이 지도를 따라 수해에서부터 아스트라시아를 거치고 치오루이산을 비껴 돌아 그레이릿지에 도착할 때까지 걸었다. 라짐 촌장의 손에 이끌려 시트로마을에 도착한 이후로 지도는 필요가 없어졌다.

시안도 곧잘 지도를 본다. 시안은 오래 된 지도를 보지 않는다. 새로 만들어지는 지도를 본다. 어린아이가 글씨를 읽는 방법을 배우는 것처럼 시안은 시트로마을을 떠나게 되면서부터 지도 읽는 법을 배워갔다. 처음 가보는 마을의 이름, 처음 가보는 도시의 이름, 길을 찾는 방법, 중요한 여관과 상점. 새로운 땅에 발을 딛을 때마다 지도에 흔적이 하나씩 늘었다. 레이븐단의 활동 반경도 함께 넓어진다. 시안은 돈 세는 데 재미를 붙였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마을 아이들을 모아두고 셈하기 따위를 가르칠 때는 지독히도 싫어해서 잔꾀를 부리곤 했었으니 참 별 일도 다 있다. 일이나 의뢰를 위해 다른 마을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시안은 교역소를 빠뜨리지 않고 들른다. 상인들 사이의 소문도 잊지 않고 확인한다. 성에 연결된 게이트를 통해 레이븐단은 다른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다른 상인들보다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다. 시안의 방 한쪽 벽에는 각 지역의 특산품과 시세 따위가 적힌 종이가 빼곡히 붙어 있다. 급기야 시안은 진지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나 럼블족처럼 이름 날리는 대상인이 되어볼까 봐. 

"우리 이제 정말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거구나!"
마리카가 까르르 웃는다. 시안도 멋적었는지 코 밑을 쓱 훔치면서 웃었다. 

"뭐, 그건 해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당장 내일, 다음주, 다음달까지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 전에, 우리는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도 좀처럼 없었다. 시안이 지도에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나도 나의 내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마리카도. 제일도. 딜크도. 딜크는 시트로 밖의 지도가 필요했었을까. 오래 된 사람들의 흔적은 오래 된 지도에 남았다. 딜크의 흔적은 라로헨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지도에 남았다. 우리는 지도만큼 넓혀진 미래를 딜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과 맞바꾸어 손에 넣었는지도 모른다. 사이나스를 넘어 북쪽으로 동쪽으로 아직 가보지 못한 길들이 지도 위에 깨끗하게 남아있었다. 

by 모에라 | 2009/02/09 03:51 | 낙서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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