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이 퇴근을 선언하자마자 레이몬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데드라인까지 겨우 십분 남았다. 부국장의 설교가 늘어지는 통에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다. 시계만 닳도록 본 것 같았다. 한 달 넘도록 애타게 기다리던 오늘이었다. 오전에 들렀을 땐 물건이 아직 매장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후엔 일이 너무 몰려서 짬을 낼 수가 없었다. 부국장이 옆에 서서 독촉하면서 맴맴 울어대지 않았다면 땡땡이를 쳐서라도 샀을 터인데.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백화점에 도착했을 땐 폐점시간으로부터 3분 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잡화코너로 돌진. 서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달려가면서 책 표지를 눈으로 훑었다. 매진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매진만 아니어라. 있다! 딱 한 부 남았다! 크리스마스 한정 이리아의 사인이 동봉된 알캉시엘 팬북! 화려한 그녀만큼이나 표지도 고져스했다. 레이몬드는 책을 집어 들려 했다. 등 뒤로부터 갑작스레 한기가 휙 몰아치는 바람에 레이몬드는 책에 손을 얹은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추운 것과는 달랐다.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발이 저린데 발끝 하나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허튼 짓을 했다간 큰일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이것이 바로 이야기로만 듣던 살기란 것인가. 숨을 있는 힘껏 들이쉬고서 레이몬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 안녕, 분명 특무지원과에……. 란디라고 했던가?”
“안녕하심까. 그거 지금 사실 겁니까?”
“아하하하하하. 아니, 아니야. 난 나중에 살께. 먼저 사도록 해.”
“아, 안녕, 분명 특무지원과에……. 란디라고 했던가?”
“안녕하심까. 그거 지금 사실 겁니까?”
“아하하하하하. 아니, 아니야. 난 나중에 살께. 먼저 사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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