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24 / 제로궤적

과장이 퇴근을 선언하자마자 레이몬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데드라인까지 겨우 십분 남았다. 부국장의 설교가 늘어지는 통에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다. 시계만 닳도록 본 것 같았다. 한 달 넘도록 애타게 기다리던 오늘이었다. 오전에 들렀을 땐 물건이 아직 매장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후엔 일이 너무 몰려서 짬을 낼 수가 없었다. 부국장이 옆에 서서 독촉하면서 맴맴 울어대지 않았다면 땡땡이를 쳐서라도 샀을 터인데.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백화점에 도착했을 땐 폐점시간으로부터 3분 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잡화코너로 돌진. 서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달려가면서 책 표지를 눈으로 훑었다. 매진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매진만 아니어라. 있다! 딱 한 부 남았다! 크리스마스 한정 이리아의 사인이 동봉된 알캉시엘 팬북! 화려한 그녀만큼이나 표지도 고져스했다. 레이몬드는 책을 집어 들려 했다. 등 뒤로부터 갑작스레 한기가 휙 몰아치는 바람에 레이몬드는 책에 손을 얹은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추운 것과는 달랐다.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발이 저린데 발끝 하나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허튼 짓을 했다간 큰일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이것이 바로 이야기로만 듣던 살기란 것인가. 숨을 있는 힘껏 들이쉬고서 레이몬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 안녕, 분명 특무지원과에……. 란디라고 했던가?”
“안녕하심까. 그거 지금 사실 겁니까?”
“아하하하하하. 아니, 아니야. 난 나중에 살께. 먼저 사도록 해.”

10.12.22 / 제로궤적

연기를 토해내는 느낌이냐고 묻자 한을 토해내는 느낌이라는 답을 들었다. 별 맛 없으니까 큰 기대는 하지 마라. 담배를 피운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그냥 피는 거다. 너도 그냥 피우게 될 거다. 금방 익숙해진다. 처음 피울 땐 겉담배부터 해라. 초보자가 속담배부터 피우려 들었다간 고생 좀 할 거다. 주의사항을 깜빡 잊고서 연기를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가 란디는 아주 혼이 났다. 목이 사정없이 따끔거렸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콜록대고 났더니 머리가 멍해졌다. 목 안쪽을 빙 둘러 잿더미가 아예 눌어붙었는지 아무리 기침을 해도 개운해지지가 않았다. 구역질을 하면서 토해낼 한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내멋대로 설정. 란디가 담배를 배운 건 막 크로스벨로 흘러들어와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어슬렁거리던 시절. 전수자는 카지노의 단골 손님들. 경비대 시절엔 곧잘 피다가 요새는 잘 피우지 않는다. 애들이 있으니까. 어쩌다 가끔 과장님이랑 나란히 물고서 신세한탄 하는 정도. 에니그마 스트랩의 라이터는 경비대 시절부터 쓰던 것.

10.12.21 / 제로궤적

“내가 로이드도 외톨이 탈출시켜 줄께!”

뒤통수 언저리에서 머리카락이 갈리고 당겨지는 느낌이 생소했다. 눈까지 따라 당겨지는 것 같았다. 혼자 삐져나온 머리카락 하나가 콱 잡아채이는 바람에 로이드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소리가 새나오기 전에 이 악물고 참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뒤에 선 키아를 놀라게 할 뻔 했다. 키아는 깔깔거리고 손뼉치고 좋아서 난리가 났다. 손을 뻗어 만져보니 뒤통수 양쪽에 방울이 두 개 솟아있었다. 눈앞에선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얼굴 셋이 두둥실 떠올랐다. 모두들 키아처럼 좋다고 신나게 웃고들 있었다.

“키아, 이거 풀면 안 될까?”
“로이드, 맘에 안 들어?”

키아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웃다 웃다 못해 얼굴이 새빨개진 에리가 얼른 끼어들었다.

“어머, 로이드 너무하네. 키아가 공들여 머리를 묶어줬는데.”
“로이드씨는 그대로 나가셔도 아무 문제없지 않을까 합니다만. 참, 저랑 에리씨는 오늘 본부 업무 보조 요청이 들어와 있으니까 조금 늦게 나가겠습니다. 대신 로이드씨가 키아를 주일학교에 무사히 데려다 주시는지 옥상에서 지켜보도록 할게요.”
무섭다 티오. 눈 깜빡 안하고서 실컷 놀리고 있다. 로이드는 세 사람 째의 갈래머리를 쳐다보았다. 란디도 한마디 했다.

“로이드 멋지다! 키도령 솜씨 좋구먼.”
“란디, 남이야기 할 처지가 아니라고 보는데.”
“흐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나보단 로이드가 훨씬 멋진걸. 난 다른 사람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아는 나이스가이라고. 그렇지 키도령?”
“으응, 로이드 괜찮은 거지?”

키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로이드를 들여다봤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매번 애를 이렇게 버릇없이 키우면 안 되겠다고 다짐하건만 키아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마는 로이드였다. 결정이다. 오늘은 다 함께 양 갈래 머리로 임무 수행이다. 머리가 짧아서 양 갈래 업스타일로 머리를 묶어 올린 로이드도 함께다. 로이드는 란디를 흘끗 보았다. 스물 넘은 남자가 머리를 양쪽으로 땋고서 뭐가 그리 신나는지 낄낄거리고 있다. 평소에 머리를 길게 묶고 다니니까 위화감이 덜한가? 잘 모르겠다. 하여간 이렇게 하고서 유격사지부에라도 들르면 다들 아주 좋아해줄 것 같다. 로이드는 오늘 하루 거울은 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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